‘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산다’는 말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의 완성이 예수인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타락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 앞에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일에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둘째, 따라서 항상 정죄, 판단, 실패감, 죄책감 등에 눌려 있습니다. 스스로를 볼 때에 늘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그래서 속마음을 감추고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을 열정적인 종교생활로 덮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다르게 사는 이방인들을 훈계하는 이유입니다. 사도바울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본인도 죽고, 남들도 죽이는 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3:10).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십자가의 용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율법으로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의’를 주신 예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가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시종일관 야단치듯 강하게 호소합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은 실제 문제를 다룹니다. 교인 간 갈등, 우상숭배, 음란함, 이단.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런 문제 대신, 율법주의라는 가짜복음을 다룹니다. 율법주의는 도덕적 인격적 문제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우리 안의 가짜복음, 내 영혼을 죽게 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까지 두려움으로 사로잡는, 무엇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가짜복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조 목사님은 정말 좋은데, 3대째 기독교 가정은 아니지요?” 저를 위해 주시는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아직도 안타까운 질문입니다. 예수의 심장을 가졌는데 유대인은 아니지요? 예수를 위해 삶을 던졌는데 율법을 못 지키는 것 많지요? 같은 질문으로 들립니다. 저를 판단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무시하는 질문이라서 화가 납니다. 제가 목사로, 성도로 사는 것은 우리 가족이 3대째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해도 교회를 계속 섬기는 것은, 제 능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능력, 예수 이름의 능력 때문입니다. 나에게 자격이나 능력을 찾으려는 생각을 오늘부터는 멈추세요. 예수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예수! 연약하고 실패해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예수, 오직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로 충분하고, 예수면 과분합니다. 율법 앞에서 실패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저주 받으셨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지금도 부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