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 당하여 믿음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다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음이 생겨서 회개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전해지면서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초기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사건으로 거기까지는 받아 들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자격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용서와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복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자격도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헷갈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율법을 깨닫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속에서 일하는 것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인가?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 훨씬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믿음의 후손이지, 율법을 지키는 후손이 아닙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보다 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도, 회개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하면 됩니다. 실제로 이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고,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복음과 관계 없는 요구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흔들립니다. 복음은 자유롭게 하지만, 가짜복음은 두렵게 합니다. 복음은 은혜를 보게 하고, 가짜복음은 겉모습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위기 속에 평안을 가져오고, 가짜복음은 평안을 흔들고 헷갈리게 합니다.
자유 대신 부담이, 평안 대신 두려움이 더 크다면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람들의 기대가 더 크다면 다시 복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십자가 복음, 하나님의 은혜, 죄인일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열심.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열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변함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살아갈 힘이고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