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역할, 예수의 복음 (갈 3:23-29)

율법의 역할은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3:23)이란, (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시기 전; (2) 개인적으로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 전 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은 선하시며 완전하시기 때문에, 율법 자체는 선하며 완전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운영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우고, 이웃과 사랑하는 삶도 배웁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깨닫습니다. “율법으로, 사람의 노력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구나.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나?”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탄식한 것처럼, 율법 아래에 살면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구원자 예수에게로 인도합니다. “내 노력으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구나. 율법을 지키는 대신,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로 완전한 의를 입을 수 있구나.” 율법은 의로움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구원자 예수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았건, 이방인이라 할례가 없건 하나님 앞에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 용서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용서 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한 자손이고,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받는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 십자가 복음을 믿고 나면, 성도는 ‘너’도 나와 한가족인 걸 깨닫습니다. 이전에는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관계 없는 사람, 잘못하고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통하는 사람, 비슷한 사람만 나와 관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가족인 걸 깨닫고 나면 눈이 달라지고, 마음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내가 ‘유대인’이라서, 비교적 율법을 잘 지켜서 이방인과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예수 안에서 이제는 나도 너도 용서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종이라서 부끄럽고 위축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 모두 예수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함께 예수를 섬기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차이’를 보지만, 예수 안에 있을 때에는 ‘한 마음’을 봅니다. 율법주의는 끊임 없이 분리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28,29절을 ‘나’에게 주는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읽어 보세요. 나는 종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자격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나는 죄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브라함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가 자랑, 기쁨, 소망입니다. 예수 안에서  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한 가족으로 살아갑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공동체를 세워 갑니다.

율법주의의 진짜 문제들 (갈 3:10-14)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산다’는 말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의 완성이 예수인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타락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 앞에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일에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둘째, 따라서 항상 정죄, 판단, 실패감, 죄책감 등에 눌려 있습니다. 스스로를 볼 때에 늘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그래서 속마음을 감추고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을 열정적인 종교생활로 덮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다르게 사는 이방인들을 훈계하는 이유입니다. 사도바울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본인도 죽고, 남들도 죽이는 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3:10).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십자가의 용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율법으로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의’를 주신 예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가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시종일관 야단치듯 강하게 호소합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은 실제 문제를 다룹니다. 교인 간 갈등, 우상숭배, 음란함, 이단.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런 문제 대신, 율법주의라는 가짜복음을 다룹니다. 율법주의는 도덕적 인격적 문제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우리 안의 가짜복음, 내 영혼을 죽게 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까지 두려움으로 사로잡는, 무엇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가짜복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조 목사님은 정말 좋은데, 3대째 기독교 가정은 아니지요?” 저를 위해 주시는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아직도 안타까운 질문입니다. 예수의 심장을 가졌는데 유대인은 아니지요? 예수를 위해 삶을 던졌는데 율법을 못 지키는 것 많지요? 같은 질문으로 들립니다. 저를 판단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무시하는 질문이라서 화가 납니다. 제가 목사로, 성도로 사는 것은 우리 가족이 3대째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해도 교회를 계속 섬기는 것은, 제 능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능력, 예수 이름의 능력 때문입니다. 나에게 자격이나 능력을 찾으려는 생각을 오늘부터는 멈추세요. 예수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예수! 연약하고 실패해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예수, 오직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로 충분하고, 예수면 과분합니다. 율법 앞에서 실패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저주 받으셨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지금도 부어집니다.

가짜복음, 진짜복음 (갈 3:1-9)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 당하여 믿음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다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음이 생겨서 회개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전해지면서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초기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사건으로 거기까지는 받아 들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자격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용서와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복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자격도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헷갈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율법을 깨닫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속에서 일하는 것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인가?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 훨씬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믿음의 후손이지, 율법을 지키는 후손이 아닙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보다 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도, 회개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하면 됩니다. 실제로 이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고,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복음과 관계 없는 요구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흔들립니다. 복음은 자유롭게 하지만, 가짜복음은 두렵게 합니다. 복음은 은혜를 보게 하고, 가짜복음은 겉모습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위기 속에 평안을 가져오고, 가짜복음은 평안을 흔들고 헷갈리게 합니다.

자유 대신 부담이, 평안 대신 두려움이 더 크다면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람들의 기대가 더 크다면 다시 복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십자가 복음, 하나님의 은혜, 죄인일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열심.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열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변함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살아갈 힘이고 소망입니다.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날 때 (갈 2:11-16)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을 두려워 해서 식사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대로라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걸 알고 있는 베드로는 유대인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도 유대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에게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주시고,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행 10:1-23), 복음의 본질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지 여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본질을 알면서도) 다시 율법 아래에서 행동했을까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2:12).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비판 받을까봐, 그래서 자신의 권위나 명예에 손상이 올까봐 두려웠습니다. 복음의 본질에만 집중했다면 두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자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 십자가의 용서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질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며 눈치를 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위를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칭찬 받는 삶 인기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본질,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질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죄나 우상도 회개해야 하지만, 위선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16:1-12).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겁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도 했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마 23:25-36). 사람은 기쁘게 할 지 모르지만, 잠깐 인기는 얻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 16:7). 성령께서 책망하고 꾸짖으실 때 듣는 귀가 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껍데기 신앙을 보게 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의 칭찬, 율법 아래에서 노력하는 것, 우리는 그런 것으로 완전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 났습니다 (갈 2:20). 죄인인 내가 예수 안에 살아났다면, 죄인인 나의 이웃도 예수 안에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껍데기 신앙은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지만, 십자가 신앙은 공동체를 가깝게 합니다. 나의 위선을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성도간에도 가까워 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아니라, 평가 받고 두려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함께 하게 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며,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보다 앞선 것들이 있다면 회개합니다. 미워했던 마음도, 사람을 두려워 했던 마음도, 인정과 칭찬에 끌려 다녔던 마음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 (느 9:19-29)

스스로 불행해 지는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없는 것’ 혹은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워 보면, 아기 때부터 ‘하면 안 되는 것’만 골라 하는 것 같습니다. 서랍 문을 다 열고, 바닥에 개미 벌레도 주워 먹었을 겁니다. 높은 데 올라가고, 의자도 많은데 유리테이블에 올라가고.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그건 안 합니다. 좋은 장난감 앞에 놔줘도, 위험한 가위나 젓가락 가지고 놀아요. 부모는 안 그러고 싶어도 자꾸만 ‘No’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기들도 제일 빨리 배우는 말 중 하나가 No 입니다. 엄마 아빠가 못하게 한 것만 기억해요.

‘욕망’의 문제입니다. ‘욕망’ 그 자체는 필요합니다. ‘욕망’이 있어야 발전이 있고, 성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의 방향’이 잘못되면 불행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수만 가지인데, 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를 욕망하면 불행합니다. 주어진 것이 너무 많은데, 없는 것 하나를 욕망하면 괴롭습니다. 아기들에게도 부모가 해 준 좋은 것이 많은데, 못 가진 것, 안 해 준 것, 그 하나에 집중하면 불행해 집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신들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실하게 우리 곁에서 인도하셨는지 깨닫습니다. 버려 두지 않으셨고,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19). 가르치시고, 음식과 물을 항상 채워 주셨습니다 (20). 무려 40년 동안 돌보셨기 때문에, 광야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약속하신 땅도 주셔서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큰 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불순종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는데, 없는 것 하나를 갖고 싶어서 이방인들과 결혼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외면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에서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만 가지를 제쳐두고 선악과에 손을 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넘치는데도, ‘왜 못 하게 하나? 왜 안 주시나?’ 하나에 꽂히면 불행합니다.

지난 일 년을 돌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하셨고 좋으셨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우리가 넘어질 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때에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원하는 것 한 가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그 하나에 마음을 쓰느라고 슬픔과 불행에 갇혀 버립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살아계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이 변치 않으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없는 것, 없어도 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불행했던 시간들을 내려 놓고,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합니다.

'온전함’에 대하여 (느 9:9-18)

우리는 자주 ‘온전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가 되고 싶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고 싶다.” 여러분이 말하는 ‘온전함’은 무슨 뜻입니까? 진심을 다해서, 지성과 감정 모두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대하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도덕적 율법적으로 흠이 없으면 ‘온전’합니까?

제사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온전한 제물’만 받으십니다. 제사장들도 ‘온전함’을 의미하는 의복을 입고, 정결의식을 행합니다. 사람이 완벽하게 온전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온전하시니 온전한 것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함’ 하면 제물이나 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흠이 없어야 하고,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온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온전한 제물이 되셨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온전함은 무엇일까요? 본문이 말하는 온전함은 도덕적 율법적인 온전함이 아니라, 관계에서의 온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성실하셨고, 변함 없이 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악하고 하나님을 떠나 배신할 때에도,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상을 세우거나, 계명을 어긴 것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관계를 더럽혔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망가트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분의 선하심을 외면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뒤로 한채 마음대로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온전하시듯, 우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성실하십니다.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끄십니다. 그분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주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리고, 다함이 없는 주님의 임재/함께하심이 부족한 나를 온전함으로 끌고 갑니다.

가을을 시작하며 (느 9:1-8)

가을을 시작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제 영혼이 메마르고, 죄성이 올라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제 삶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볍습니다. 읽어도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깨달아도 영혼이 냉랭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남습니다. 감사도, 회개도, 마음과 삶 깊이 닿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저는 천천히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메모하며 읽어가다 보면, 산만하고 메마른 마음이 다시 생명으로 살아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해 집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고, 무너진 도시의 성벽을 다시 쌓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능력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말씀을 들으면서 잠들어 있던 그들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해 지면 영혼이 살아 납니다. 삶이 변화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기(초막절)를 지켰습니다. 그 전에도 절기를 지켰었지만, 이번에는 전심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회개하는데, 특히 이방인들과 절교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삶의 방식과 결별한 것입니다.

금식은 즐거움을 끊어내는 것 이상입니다. 내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결박과 죄의 굴레를 끊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금식하며 이방인에게서 온 우상, 세속적인 가치관과 깊이 박혀 있는 삶의 습관들을 다 잘라 냅니다. 우리 속 죄, 우상, 세속적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결심만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뉘우친다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가나안 정착 때 남아 있던 이방인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결국 그들과 함께 세속화 되어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우상과 죄를 끊어내는 능력은 오직 기도에 있습니다. 특히 금식기도가 유익합니다. ‘바꿔야지’ 하는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말씀 앞에 생명을 걸고 기도할 때 진실로 변화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깨닫고, 잠깐 마음으로 회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삶 전부를 걸고 순종하라고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정결함을 회복하고, 우상/세속과 절교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주인으로 모십니다.

다른 종류의 위로 (살전 3:7-13)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90년대 사진을 보면, 한국인의 성실성과 열정이 굉장합니다. 물난리가 나도 출근을 하고, 한 반에 50명이 넘었는데 선풍기 세 대로 여름을 났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예전에 어떻게 그 무더위에 가득 찬 열차를 매일 타고 통학했을까 놀라웠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산 만큼,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가장 크게 유행한 단어는 ‘힐링’입니다. 미디어, 서점, 여행, 음식에서 온통 힐링을 앞세웠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욜로’, 그리고 이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만족’하려는 시도를 절대 지켜-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위로, 만족, 행복, 감사, 모두 그만큼 중요하고, 실제로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런 것들은 일시적입니다. 밥 먹어도 또 배고프고, 자고 일어나도 또 졸린 것과 같습니다. 소유와 성취에서 오는 만족은 기쁨을 주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계속 반복하다 보면 피로하고, 허무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고 난 뒤 “헛되고 헛되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얻은 행복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너무 수고하고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육체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다르게 해결해야 합니다. 육체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몸을 채우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만, 영혼을 채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습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서로 고난과 핍박 중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계속되면, 궁핍, 환난, 어려움이 해결되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경험하는 위로, 기쁨, 감사 는 ‘환란 중에도 믿음에 굳게 선 성도들’입니다.

첫째,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은 흔들려도 꺾이거나 죽지 않습니다. 상황 때문에 흔들리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과 상황을 뚫고 열매 맺습니다. 환란을 뚫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명이 삶으로 열매 맺을 때, 서로에게 큰 선물이고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도 어떤 목사가 가장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셀럽 같은 목사, 내 기분을 잘 맞춰주는 목사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 다해 살아가고, 환란 중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목사가 가장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려워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만날 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어렵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친구의 삶을 바라볼 때, 거기에 위로와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