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날 때 (갈 2:11-16)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을 두려워 해서 식사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대로라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걸 알고 있는 베드로는 유대인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도 유대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에게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주시고,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행 10:1-23), 복음의 본질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지 여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본질을 알면서도) 다시 율법 아래에서 행동했을까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2:12).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비판 받을까봐, 그래서 자신의 권위나 명예에 손상이 올까봐 두려웠습니다. 복음의 본질에만 집중했다면 두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자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 십자가의 용서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질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며 눈치를 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위를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칭찬 받는 삶 인기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본질, 하나님의 은혜가 흐려질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죄나 우상도 회개해야 하지만, 위선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16:1-12).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겁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도 했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마 23:25-36). 사람은 기쁘게 할 지 모르지만, 잠깐 인기는 얻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 16:7). 성령께서 책망하고 꾸짖으실 때 듣는 귀가 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껍데기 신앙을 보게 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의 칭찬, 율법 아래에서 노력하는 것, 우리는 그런 것으로 완전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 났습니다 (갈 2:20). 죄인인 내가 예수 안에 살아났다면, 죄인인 나의 이웃도 예수 안에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껍데기 신앙은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지만, 십자가 신앙은 공동체를 가깝게 합니다. 나의 위선을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성도간에도 가까워 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아니라, 평가 받고 두려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함께 하게 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며,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보다 앞선 것들이 있다면 회개합니다. 미워했던 마음도, 사람을 두려워 했던 마음도, 인정과 칭찬에 끌려 다녔던 마음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